[관웅그래/천그래] 라면

ㄴ미생 기타 2015. 5. 2. 08:11





실수였다. 

실수여야만 했다. 

그러나 실수라기엔 모든 기억이 너무 생생했다. 





[ 라면 ] 





관웅이 눈을 뜬 것은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머리는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어제 독한 술만 골라 마셨던 걸 생각하면 무난한 수준이었다. 머리를 몇 번 흔든 관웅은 습관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그가 절대 예상하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킹사이즈 베드에 미끈한 어깨와 등을 드러내고 옆으로 누운 저 모습은, 저 동그란 뒷통수는. 


갑자기 괜찮다고 생각했던 관웅의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마르고 가늘어 보이긴 했지만, 저건 어딜 봐도 여자의 라인이 아니었다. 차라리 소년과 청년의 중간에 있는 몸이라고 보는게 맞다. 그렇다는 것은, 저 몸의 주인은 남자다. 내가 남자와 어제 이곳에.......? 

관웅은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몸을 살폈다. 분명 나신이다. 침대 주변에는 어지럽게 두 사람 분의 옷가지가 흐트러져 있다. 어떻게 두 사람 분인걸 알았냐고? 바지도 두 개, 팬티도 두 개니까. 관웅은 점점 더 머리가 아파왔다. 내가 설마 남자와...남자와 잠자리를 함께 했다고? 


하지만 어제는, 

어제는 바이어 접대 자리였는데. 

아니 그 이전에, 

난 남자는 취미 없는데....? 


관웅은 재빨리 어제의 일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중동쪽에서 올라왔던 바이어는 융숭한 대접을 원했다. 관웅은 처음에 서포트 인원 없이 두 명의 바이어를 모시고 강남쪽으로 향했다. 바이어들의 요구로 꽤 고급 풀살롱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오 팀장에게 전화가 와 사람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냥 없어도 될 것 같았지만 술이 들어갈수록 진상이 되어가는 바이어들을 보니, 서포트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왔던 것이. 


그래서 왔던 것이 하필 전혀 도움이 안 될 것 같던 계약직 막내 사원 장그래였다. 


변변히 사람 몫이나 하겠나 싶었던 관웅의 우려와는 달리, 그래는 아가씨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곱상한 얼굴을 하고선 테이블에 이마를 박아 폭탄주를 마는 등 바이어들을 기쁘게 해주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렇게 시간은 금방 새벽으로 넘어갔고, 아가씨를 한 명씩 끼고 앉아있던 그들은 본색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장그래에게 노래를 시키거나 춤을 추게하는 것 까진 괜찮았지만,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아가씨들에게나 시킬 법한 일들을 요구하니 관웅의 표정도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관웅이 공으로 과장 직급을 단 것은 아니라, 그는 장그래를 다시 자신의 옆자리에 앉혀 보호하면서도 바이어들의 기분을 최대한 상하지 않게 만든 후 바로 풀살롱 윗층, 즉 침실로 그들을 아가씨와 함께 올려보냈다. 

장그래는 바이어들에게 농락당했던 그 잠깐의 시간 동안 혼이 나간 것인지 바이어 일행이 모두 나가고 나서도 제자리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시선은 아래로만 꽂혀 있었다. 관웅은 아직 나이도 어린 장그래가 이런 일을 겪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또한 혹여 이런 퇴폐 접대를 일반적인 것으로 생각해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아무튼 관웅의 마음은 완전 조카를 대하는 삼촌의 그것이었다. 누가 뭐래도 장그래는 관웅과 열 살도 넘게 차이가 나는 '꼬맹이'니까. 


"장그래 씨. 괜찮아?" 

"예?? 아, 예. 전 괜찮습니다, 과장님....." 


괜찮기는 개뿔. 그대로 뒀다면 바이어들은 그래에게 스트립쇼나 산삼주라도 시켰을 것이다. 정말 그런 꼴까진 보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었다. 저들이 원하던 대로 아가씨까지 끼고 밤을 보내게 해줬으니, 계약은 뒷말 없이 어떻게든 진행 될 것 같았다. 간만에 더티한 놈들이 걸려서. 


"욕봤어. 나가자." 


관웅은 그래의 어깨를 툭 치고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그 모습을 황망히 바라보던 그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멀쩡해보이던 얼굴과는 달리 아까 꽤나 쇼크를 받았는지 장그래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기어이 테이블과 소파 사이에서 다리가 엉켜 관웅 쪽으로 고꾸라지던 그래를 재빠르게 받아내자,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상사의 품에 안겨서는 금세 귀가 시뻘개진다. 관웅은 작게 한숨을 쉬며 그래를 똑바로 일으켜 세웠다. 


"정말 괜찮아?" 

"아....." 

"...." 

"솔직히.....잘 모르겠습니다.........딸꾹." 


가관이었다. 그래의 입에서 딸꾹질이 나왔다. 깜짝 놀란 듯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막아버린 장그래였지만, 한 번 터진 딸꾹질은 마치 댐이 무너진 것처럼 딸꾹, 딸꾹하며 계속 쏟아졌다. 관웅은 그제서야 그래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룸 안의 색색깔 조명들 때문에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래의 눈가가 벌겋게 흐린 것이 와서 분위기 띄운다고 급하게 마신 술로 벌써 알딸딸하게 취한 것 같았다. 


하아. 


관웅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시계를 보았다. 새벽 2시. 
그나마 오늘이 금요일인 것이 다행이었다. 


"장그래 집이 어디지?" 

"수....딸꾹, 수색동이요. 딸꾹!" 

"오늘은 택시 타고 들어가서 비용 청구해. 들어갈 수 있지?" 

"딸꾹, 그게.....딸꾹," 

"왜, 뭐 문제 있어?" 

"그.....딸꾹! 과장님, 그러니까 과장, 님.......딸꾹!" 

"나 뭐." 

"왜 그러고 딸꾹! 계세요??" 

"내가 왜." 

"딸꾹, 과장님이, 딸꾹! 이케.....드 명......." 


아 XX 설마. 장그래. 


"헤헤, 과장님, 딸꾹! 과장님이 드 명이네여? 딸..꾹!!" 


장그래 발음이 급속하게 꼬여갔다. 다시 한 번 어깨를 붙잡고 눈을 맞춰보니, 장그래 얼굴에서 헤실헤실 웃음이 발사되고 있다. 그 얼굴이 또 완전 어려보여서 관웅은 급격히 당황스러워졌다. 그런 관웅의 형편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래는 헤실대며 관웅을 향해 웃음을 쏘아댄다. 


"과...장님! 딸꾹.....우리, 해장하고 가여! 딸꾹!" 

"장그래." 

"딸꾹! 라면...나 라면 디게, 잘 끓이는데.....딸꾹!" 

"장그래," 

"이케이케....파 송송....계란 탁!! 딸꾹~" 


그래는 급기야 눈을 감고 파 써는 흉내를 내더니 팍 하고 계란(?)을 관웅 코 앞에 깨트린다. 가만 뒀다간 바로 넘어갈 것이 뻔하기 때문에 관웅은 그래를 두 손에 안고 그 꼴을 다 보아야 했다. 이대로 택시 태워 보내면 귀가는 고사하고, 어디 어두운 놀이터에서 아리랑치기나 안 당하면 용한 상황이다. 


"과...과장 딸꾹! 님이, 라면 맛을 아라여??" 

"...너 일단 여기서 좀 나가고 보자." 


관웅은 한숨을 쉬고 그래를 부축해 문을 열고 나갔다. 오늘 돈을 많이 쓴 관웅 일행을 보고, 상무며 마담이 뛰쳐나와 융숭하게 인사를 한다. 어이쿠, 여기 이 분 괜찮으시겠어요? 완전 갔네, 갔어. '상무님'이 장그래 걱정을 하며 관웅을 쳐다본다. 관웅은 자기 팔에 눈을 감고 기댄 채 계속 옹알이처럼 뭐라 중얼거리는 장그래를 내려다 보며 또 한번 한숨을 쉬었다. 장그래 소원대로 라면 먹고 가는 수밖에. 일단 술은 깨야할 것 아닌가. 

가게에서 완전히 나와, 거리로 나가자 늦여름인데도 꽤 쌀쌀한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관웅은 피곤했다. 갑자기 한 열 살은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이런 꼬맹이를 접대 자리에 부르는게 아니었는데. 
취해서 기껏 파송송 계란탁 거리는 애기를. 
후회 막심이다 정말. 


속으로 쓰게 반성하던 관웅은 곧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강남 뒷골목 포차촌으로 그래를 부축해 데리고 갔다. 








"장그래. 라면 맛있냐?" 

"......맛 없는데요. 딸꾹!" 


관웅은 점점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지금까지 관웅이 회사에서 보아왔던 장그래라는 청년은, 묵묵하게 자기 일을 하고, 상사의 말을 하늘같이 모시는, 그러면서도 자기 주장을 내세울 때는 또 내세우는, 그런데도 외모는 참 여려보이는 그런 캐릭터였다. 그러나 지금 포차 안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아있는 이 장그래는, 그냥 어디 대학가에서 주정뱅이 한 명을 툭 뽑아온 것만 같은 캐릭터로 변해 있었다. 


"...장그래 주사가 좀 있구나." 

"과장님...나 이거 딸꾹, 안 머글래요." 


아까부터 라면그릇을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인양 코를 박고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래가 갑자기 어린애처럼 땡깡을 부렸다. 관웅은 뭐라고 하려다가, 그것조차 귀찮아져 그냥 유리컵에 물이나 잔뜩 따라 그래에게 내밀었다. 


"라면 안 먹을 거면 물 마셔." 

"시른데.....딸꾹." 

"마셔야 술 깨지." 

"시러여............딸꾹." 

"아까 라면 먹고 싶다며?" 

"딸꾹! 라면에.....딸꾹, 계란이 없다......딸꾹" 


혼잣말인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신경 거슬리게 하는 반말이었다. 관웅은 잠깐 이마를 짚고 속으로 참을 인 자를 세 번 그렸다. 
사실 장그래만 취한 것이 아니었다. 관웅도 취기가 올라온 상태였고 피곤했다. 이 자리는 연이은 지방 출장 뒤 쉬지도 못하고 바로 투입된 접대자리였다. 장그래? 아까 잠시 유용했는지 몰라도, 지금은 서포트는 커녕 짐짝에 가까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버리고 갈 수도 없는 짐짝. 아주 애물단지다. 

그럼 그렇지, 이런 어린애가 뭘 한다고. 

월요일 출근하면 오 팀장에게 아주 진상을 부려야겠다고 다짐하는 관웅이었다. 








"자, 장그래 다 왔다. 얼른 자라!" 


그렇게 술은 깰 기미를 보이지 않고, 관웅도 점점 어지러워지고, 먹으라고 시켜준 라면은 먹지도 않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그래를 데리고 관웅이 온 곳은, 강남 뒷골목에 흔하디 흔한, 아니 흔한 것보단 좀 더 고급스러운 모텔이었다. 젊은 영혼들이 주말 밤을 불태우고 있는 것인지 일반실은 다 차있어서 본의아니게 특실로 업그레이드를 해버리게 되었고. 

관웅은 손목시계를 살폈다. 벌써 새벽 4시였다. 이미 와이프도 잠들었을 시간. 아까 잠시 문자를 보내놓긴 했지만, 외박이 되는건 변함없다. 관웅은 고개를 흔들었다. 앞으로 다가올 주말에 와이프에게 시달릴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넌더리가 났다. 이게 다 장그래...요 녀석 때문에.....! 

관웅은 새삼 그래가 얄미워 어깨를 부축해놓은 그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는 발그레한 얼굴로 얌전하게 관웅의 팔에 기대있을 뿐이었다. 눈은 반쯤 감겨있는데, 속눈썹이 참 길고 눈매가 참 야살스럽게 생겼........ 


아 잠깐. 

내가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지. 

아무래도 오늘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보다. 



관웅은 침대 쪽으로 그래를 끌고 가 일단 그 위로 앉혀놓았다. 그러자 앉혀놓기가 무섭게 그래는 베개를 찾아 일자로 누워버린다. 관웅은 잠깐 고민했다. 집으로 들어갈까, 말까. 지금이라도 택시를 잡을 수는 있다. 하지만 1~2시간 내에 첫 차가 다니기 시작할 것이다. 돈이 좀 아까웠다. 누워서 벌써 도롱거리는 그래를 보니 관웅도 피곤한 몸을 뉘이고 싶은 맘이 간절하다. 그래,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토요일이 됐다. 모텔비는 관웅의 지갑에서 나갔다. 침대는 넓고 깨끗하다. 

관웅은 재킷을 벗어던진 후 그래 옆에 풀썩 누워버렸다. 누운 채 넥타이를 풀어 방바닥에 던지고, 리모콘을 찾아 실내등을 다 꺼버리고, 


관웅도 잠이 들었다. 









관웅은 잠결에 와이프를 끌어안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보드라운 살결이 만져졌다. 
웬일이지, 옷을 벗고 자다니.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는 밤일도 하기 힘들 정도로 나날이 빡셌던지라, 관웅의 아내는 언제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에게 갈 수 있도록 항상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왜 오늘은....? 

관웅은 이런거 저런거 생각하기 귀찮았다. 어제의 접대는 너무 고달팠다. 관웅은 아직 잠에서 덜 깬 상태였고, 방 안은 캄캄했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았다. 관웅은 비몽사몽 하는 중에도 오랜만에 아내의 맨 몸을 만지게 되자 흥분했다. 그도 그럴게, 관웅도 사내였다. 아직 30대. 아침마다 어김없이 씩씩하게 텐트를 치는 '사내'였던 것이다. 


"여보..." 


관웅은 슬그머니 아내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그리고 어깨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래도 아내는 요지부동이었다. 깊게 잠든 모양이다. 순간 관웅의 마음 속에 조금 야한 욕망이 싹텄다. 관웅은 일단 자신의 셔츠를 벗었다. 셔츠를 다 벗자, 이번엔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벗어 침대 밖으로 던졌다. 부드러운 시트와 이불이 맨 살 위로 느껴졌다. 관웅은 눈을 감은 채 아내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몸은 착 겹쳐져 있었다. 관웅은 아내의 뒷통수에 한번 쪽 하고 키스한 후 뒤에서 깍지를 꼈다. 아아. 이게 얼마만에 안아보는 아내의 몸인가. 이게 얼마만에 제대로 해보는 XX인가...! 



근데.... 

요즘 애 돌보느라 고생이 심했던 걸까. 

몸이 많이 말랐네..... 

샴푸도 바꾼 건가? 향도 좀 다른데. 

에라. 

모르겠다. 

오늘 아침은 욕망에 충실하련다. 



관웅은 꿈결인 듯 졸린 눈을 그대로 감은 채, 아내의 고개를 돌려 깊이 입맞추기 시작했다. 









몸이 간질간질하다. 어깨에 따뜻하고 촉촉한 것이 내려앉는다.
곧이어 누군가가 자신의 고개를 돌려 입맞춰 온다. 그래는 얼결에 입을 다물었지만, 곧 부드럽게 뺨을 훑어오는 손길에 조금 입술을 열어주고 말았다. 그러자 곧바로 뜨거운 뭔가가 입 안으로 들어와 헤집고 핥아댄다. 그래는 숨이 막힐 정도로 깊은 키스를 받았다.


아. 기분 좋은 키스다....

근데 잠깐.

여기가 어디지?

지금이 몇시지?

나 분명 어제......



음.



생각이 나질 않는다.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그저 계란도 없이 성의없게 끓여져 있던 라면의 초근접 화상. 

왜, 왜 이런게 머릿속에.


뭐지...
라면......계란도 없이 파만 송송.......
라면..........



그래 머릿속이 순식간에 아찔해졌다. 세상이 진짜로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기분이다. 
아, 이 기분은 뭐지. 어지럽다. 이건 꿈인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래는 자신의 맨 살 위를 스치는 따뜻한 손길에, 한없이 깊게 다가오는 입술에 모든 생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기분 좋은 꿈은 오랜만이니까.


그래는 철썩같이 이 모든게 꿈이라 믿으며,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은 이를 향해 몸을 돌리고 다시 입맞춤을 돌려주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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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웅그래/천그래] 알고 있어 (토마토님 리퀘)

ㄴ미생 기타 2015. 5. 1. 17:58



[알고 있어]







업무차 손님과 밖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들어온 관웅은 책상 위에 놓여있는 "감사합니다"라고 쓰인 쪽지를 발견했다. 영문을 모를 쪽지에 주변을 둘러보다 관웅은 문득 앞자리에 앉은 장그래와 눈이 마주쳤다. 장그래는 고개를 까딱 하고 관웅과 눈을 맞추며 인사했다. 그리고 입모양으로 작게 말했다. "잘 먹었습니다" 그제서야 관웅은 그래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깨달았다.


팀 막내인 장그래가 유난히 군것질을 좋아해서 책상 서랍에 항상 맛있는 것들을 채워두고 있다는 것을, 사실은 팀에서 관웅이 제일 늦게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알게된 후론 항상 그래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는 그였다. 별다른 이유는 아니었고, 그저 꼼질거리며 책상을 열고 안을 더듬어 단 것을 찾아 입에 쏙 넣고 오물거리는 모습이 귀여워서였다. 꼭 다람쥐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어느날, 관웅은 한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되었다. 그 다람쥐가 바로 자신을 좋아한단 사실이었다. 굳이 알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과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쑥스러운듯 고개를 피하며 볼을 발갛게 물들이는데 알아채지 못할 수 없었다. 왜 하필 남자인, 그것도 유부남인, 나이도 열한 살이나 많은 자신을 좋아하게 된 걸까? 장그래가 (숨기려 하지만) 내비치는 감정은 단순한 동경이나 호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관웅은 30대 후반의-연애도 결혼생활도 해볼 만큼 해본-남자로서, 도무지 저 어린 청년이 어쩌다가 자신을 사랑하게 됐는지 도통 모를 노릇이었다. 한창 알콩달콩한 연애를 할 시기가 아닌가, 저 또래는. 자신만큼이나 어리고 풋풋한 여성과, 사랑으로 인한 모든 첫 경험들을 하며. 그런데 왜 이런 닳고 닳은 유부남에게 엉뚱한 감정을 품은 것인가? 관웅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편으로는, 저 나이땐 모든 것이 다소 충동적이고 무모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 장그래에게 다소 냉정하게 굴었던 관웅이었다. 결코 좋은 감정 가지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쩌면 장그래는 자신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사명감을 사랑과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장그래의 감정이란 관웅에게 다소 미스테리어스한 것이었다.


관웅은 일어서서 그래에게 다가갔다. 그래가 흠칫 놀라며 다시 뒤돌아 자리에 앉은 채 관웅을 올려보았다. 관웅은 싱긋 웃고 "사실은 내가..."라고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가 장그래에게 내민 것은 회사 근처의 유명하다는 제과점에서 사온 쿠키였다. 한 개에 천 오백원 짜리. 딱 받기에 부담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성의없어 보이지도 않고. "오늘 손님이랑 커피 마신 데가 이걸로 유명하다길래."


그래의 눈이 놀라움에 커졌다가, 얼른 두 손을 내밀어 그 쿠키를 받는다. "가, 감사합니다 과장님," 관웅은 별 것 아니라는 듯 씩 웃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장그래는 좀처럼 손에 든 쿠키에서 눈을 뗄 줄을 모른다. 얼굴은 벌써 벌개져있다. 뜨거운 두 뺨을 본인도 느꼈는지, 얼른 의자를 돌려 모니터에 얼굴을 박는다.


관웅은 가끔 생각했다. 자기가 더 젊었으면 어땠을까. 예를 들어 장그래와 같은 나이였다면. 그러나 그는 이미 37살이기에 그런 가정따위 무의미한 것이었다. 자신이 아직 싱글이었다면 어땠을까, 이 또한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것이었다. 자신은 이미 나이들었고 결혼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하나 깨닫게 된 것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장그래가 알았다면 정말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그래는 영원히 알 수 없겠지.



관웅이 깨달은 진실은 이것이었다. 어릴 수록 쉽게 사랑하고, 나이 들수록 사랑에 빠지기 어려워 진다. 때문에 나이 들어 하는 사랑일수록 더 깊고 뜨거울 수 있다.



자신의 장그래를 향한 표현은 딱 이정도가 좋다. 귀여운 팀 막내에게 간식거리를 가끔 챙겨준다거나 하는. 그러나 여기서 더 나가면 곤란한 것이다. 장그래는 절대로 관웅의 마음을 알아선 안 됐다. 조그만 마음의 조각조차 눈치채서는 안됐다. 대신 관웅만이 장그래의 마음을 알고, 느낄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느낀다 할지라도 모르는 척 해야 했다. 사랑하지 않는 척. 사랑받는지 모르는 척.


장그래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열 때문에 자신의 두 뺨을 손으로 감쌌다. 오늘따라 왠지 천과장의 눈빛이 따뜻한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관웅 과장님은 내가 좋아하는 것도 모르는데. 안다 해도, 날 좋아해주실 리 없는데. 모든 것이 관웅의 뜻대로 돌아가고 있었고 그래는 착실하게 관웅의 의도 안에서만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의 사랑은 어디로도 뻗어나갈 수 없었다. 심지어 관웅에게로도.


관웅은 허둥대는 그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담배를 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때면 관웅은 담배를 피지 않고 버틸 자신이 없었다. 넝쿨보다도 빠르게 자라나는 자신의 마음을 얼른 뿌연 연기로 감춰야만 했다. 관웅은 자신이 어쩌다 이런 불량 중년이 되어버린 것인지 한심했다. 장그래가 왜 날 사랑하냐고 묻는 것보다 그 반대가 더 어려운 질문이었다.



나 천관웅은 왜 장그래를 사랑하는가?


평생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감정임을 알면서도.


장그래, 네가 날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도.



옥상으로 올라간 관웅은 사람 없는 곳으로 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언젠가 장그래 안의 그 설익은 감정은 정리가 될 것이다. 관웅을 잊고 아마도 예쁜 여자를 만나 진짜 사랑을 하게 되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면 관웅의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더 관웅은 모르는 척 해야 했다. 모든 것을. 나의 마음을, 너의 마음을.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깊이 한모금 빨아들인 관웅이 연기를 공기중에 뱉어냈다.

연기로 가려진 시야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관웅은 이제 자신의 마음도 보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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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웅그래/천그래] 배덕 (리핏님 리퀘)

ㄴ미생 기타 2015. 5. 1. 08:38






[배덕]






처음부터 애정같은 것은 요만큼도 없었다. 돈 때문에 했던 결혼이었다. 관웅보다 나이가 많았던 그녀는 관웅의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대가로 그가 원하는 것을 모두 다 주었다. 그녀 또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녀는 감히 사랑을 바라지는 않았다. 잘생기고 젊은 남편을 옆에 두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자기가 가질 수 있는 것 이상을 원하는 존재인지라....

그녀는 결국 관웅의 사랑을 갈구하고 말았다. 하지만 관웅은 계약 내용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단칼에 거절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번 입양이 그녀에게 얼마나 절실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폐경으로 아이가 생길 수 없는 자신의 태에는 미련을 버리고, 어느 귀엽고 머리좋아 보이는 꼬마를 데려왔다. 관웅을 알아보던 눈이니 어련히 좋은 아이를 골랐을까. '장그래'라는 이름의 여덟 살 꼬마는 그렇게 부부의 아들로 정식 입양되었다. 관웅은 허망한 그녀의 소망을 굳이 부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의 재산 중 상당부분도 이미 관웅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소꿉놀이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부인. 관웅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늙은 아내의 발버둥을 지켜보았다. 자녀가 있는 가정을 이룸으로써, 한 아이의 엄마로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그렇게라도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관웅은 그녀에게 사랑을 줄 수는 없었지만 연극에 동참해줄 수는 있었다. 최소한 좋은 아빠 흉내 정도라면.


그러나, 관웅의 이 모든 생각은 장그래를 처음 보는 순간 산산히 부숴지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아빠라고 해야지, 그래야."


"아...안녕하세요, 아빠. 저는 장그래입니다."


"그래, 아주 잘 했다 그래야."



그녀는 장그래의 어머니라기보다 할머니같아 보였다. 그래서 더 그 광경은 괴이했다. 아이는 쭈뼛거리며 새로운 '엄마'의 품 안에서 망설이다가, 관웅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그를 꼬옥 끌어안았다. 관웅은 놀라 몸을 움찔 했다. 그래는 관웅의 큰 키 때문에 한없이 올려다보며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앞으로 착한 아이가 될게요."



관웅은 그 말을 듣고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아이는, 아직 8살밖에 되지 않은 이 아이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일을 겪어왔고 거기에 익숙해졌는지. 장그래의 눈망울은 초롱했다. 투명한 갈색의 눈동자는 아름다웠다. 관웅의 잔잔한 마음 속에 누군가가 돌을 던진 것만 같았다. 가슴 속에서 물결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50대 중반의 엄마. 30대 초반의 아빠. 8살의 장그래.


이것이 가족의 시작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입양되었을 때 갓 초등학교에 들어갔던 그래는 어느새 중학생이 되어있었다. 그래의 삶은 평온했고, 만족스러웠다. 남들과 다소 다른 엄마 아빠가 있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항상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던 고아원에서, 새로운 부부가 올 때마다 날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빌거나, 선택되어 고아원을 떠날 수 있게 된 친구를 부러워하던 그 시절에 비하면....


그래의 '엄마'는 이제 60세가 되었다. 그래의 '아빠'는 37세였다. 그리고 장그래는 13살이었다.


그래가 볼 때, 아빠는 별로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엄마는 항상 아빠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래가 어렸을 때는 이 가족의 어디가 이상한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잘 해주는 사람들이 생기고, 좋은 집에서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어가며 그래도 알게 되었다. 세 식구가 밖으로 나가면 모두가 자신들을 쳐다본다는 것을. 그 시선은 기분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는 그런 시선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을 살피며 재단하는 그런 눈빛. 그래서 그래는 외출해도 항상 일찍 들어가고 싶다고 엄마와 아빠를 졸랐다. 남들이 엄마와 아빠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게 싫었다.


13살의 장그래는 사춘기였다. 그러나 워낙 조용하고 말이 없던 그래는 혼자 조용히 그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남보다 특이한 부모 밑에서 일찌감치 애어른이 돼버린 그래는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걱정 끼치길 싫어했다. 특히 나이든 엄마를 걱정시키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는 이제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부모들이 어떤 관계인지. 오랜 기간 사랑받지 못하고 살아온 엄마가 불쌍했다. 그렇다고 관웅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아내를 사랑하지 않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의 눈에는 항상 관웅의 사랑을 갈구하는 나이든 엄마가, 어쩐지 자신이랑 겹쳐 보이는 것이었다.






그 날은 엄마가 친구들과 여행을 가는 날이었다. 관웅은 모처럼 기분전환하라며 그녀를 차로 데려다주었다. 그런 관웅의 모습에 엄마는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오랜만에 친구들 앞에서 젊고 잘생긴 남편을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 또한 엄마의 밝은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엄마의 친구들은 관웅과 그래가 나란히 서있는 모습을 보고 저희끼리 한참을 꺄르륵거리며 여고생처럼 웃었다. 그녀는 환히 웃으며 두 사람을 떠났다. 나이 든 아내도, 젊은 남편도, 어린 아들도, 모두 행복한 주말 아침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관웅과 그래는 차를 주차시켰다. 잠깐 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 평소와는 달리 뭔가 긴장감이 떠도는 공기에 그래는 슬며시 관웅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엄마를 배웅할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뭐지. 뭘까. 관웅은 한 번도 그래에게 큰 소리를 낸 적이 없다. 관웅은 그래에게 좋은 아빠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분위기가 더욱 낯설고 어색한 것이었다. 잠시간의 침묵 뒤, 관웅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너....자위 하니?"


"ㄴ, 네??"



그래는 놀란 사슴처럼 눈을 뜨고 관웅을 쳐다보았다. 아차 싶었다. 최근 그래는, 몇 개월 전 첫 몽정을 겪은 후 그 은밀한 쾌감에 가끔씩 포르노물을 보며 자위를 하고는 했다. 물론 내성적인 그래답게 철저히 숨기려 했지만, 어쩐 일인지 관웅에게 들키고 만 모양이었다. 그래도 엄마에게 들킨 것 보단 나았지만 젊은 아버지에게 들키는 것도 마찬가지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관웅이 어떻게 생각할까. 지금까지 착하고 순진한 척 해왔는데, 알고 보니 발랑 까졌다고 비난하지 않을까. 그래의 머릿속에 여러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그 동안 관웅은 인내심 있게 그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는 망설이다가 결국 사실대로 실토하고 말았다.



"......네. 죄송합니다."


"아냐, 죄송할 것 없어."


"...."


"그 나이 땐 그런 거지. 엄마한텐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라."


"네......아빠."



그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왠지 부끄러워서 관웅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항상 관웅 앞에서 착하고 좋은 아이이고 싶었는데. 그래는 사랑받지 못하는 엄마를 오랫동안 지켜봐와서 그런지, 자신만은 관웅에게 사랑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건 본능적인 방어기제인지도 몰랐다. 자신의 아내에게조차 사랑을 주지 않는 관웅을 보며, 자신도 사랑받지 못하면 언제 파양당할지 모른다는. 필사적인 마음이었다.


관웅은 담배를 꺼내며 그래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말했다. 그래는 아무 말 없이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고 나갔다. 그래의 어깨가 약간 떨리고 있었다. 관웅에게 '나쁜 짓'을 들켰다는 생각에 그래는 자기 자신이 죽을 만큼 미워지고 있었다.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자, 그래는 후다닥 집을 향해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관웅은 차 안에서 담배를 피며 그런 그래의 뒷모습을 끝까지 보고 있었다.





그날 그래는 한 번도 관웅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다 저녁식사 시간에만 식탁으로 나왔을 뿐이다. 식사 시간에도 그래는 관웅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밥을 먹는둥 마는둥, 젓가락으로 밥공기를 뒤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관웅은 그런 그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는 자신에게 와서 꽂히는 관웅의 시선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역시 내게 화가난 거야. 내가 그런 짓을 해서...'



그래의 가슴이 돌로 눌러놓은듯 답답했다. 관웅이 그래에게 "밥맛이 없니?"라고 물었지만, 그래는 급히 고개를 들고 웃으며 "아니에요."라고 대답하고는 앞에 놓인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관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런 그래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래는 재빨리 밥공기를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래도 관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의 가슴이 따끔따끔했다.


결국, 먹은 것이 얹힌 그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에서 변기를 붙잡고 먹은 음식을 다 쏟아내야 했다. 탈진한 그래는 다른 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방의 불을 끈 뒤 무거운 몸을 침대에 쓰러지듯 뉘이고, 한참을 엎드린 채 있다가 꼬물거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가 제대로 누웠다. 사방이 온통 어둠이었다. 그래서 그래는 더욱 관웅의 얼굴을 잘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너 자위 하니?'



그 말을 할 때 관웅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더라. 관웅은 어떻게 자신이 자위를 한다는 걸 알게 된 걸까. 정말 아무도 모르게, 그토록 조심했는데. 행위 자체도 부끄럽다고 생각했지만 누군가에게 그런 모습이 보여졌다는 사실이 더 부끄러웠다. 특히 그것이 관웅이어서 더욱. 그래는 이제 관웅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까봐 두려웠다. 정말 바보같은 생각이었지만, 그래는 정말로 그랬다. 정말 착하고 좋은 아들이고 싶었는데.


그래는 온갖 생각들을 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어둡고 조용한 집안. 관웅과 그래 단 둘이 있기에는 너무 큰 집. 그 속의 자신만의 공간인 작은 침대 위에 누워서 곤히 자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래의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관웅은 잠시 문을 연 채 침대 위에 잠들어있는 그래를 바라보았다. 천사와 같은 얼굴이다. 아직 한없이 앳되어 보이기도 하고, 나이답지 않은 색기가 엿보이기도 하는 그런 묘한 얼굴이다. 관웅은 한걸음씩 천천히 그래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래가 누워있는 침대에 살며시 걸터앉았다. 그는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관웅은 늘 생각했다. 장그래가 커가면서 모든 것이 달라질 거라고. 더이상 이 가족을 유지할 수 없을 거라고. 나이든 아내는 더욱 빠르게 늙어갈 것이고, 장그래는 꽃처럼 피어나게 될 거라고. 그러면 더이상 관웅도 자신의 마음을 숨길 수 없을 거라고. 지난 5년간 은밀하게 품어왔던 마음이었다. 이런 관웅의 마음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관웅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래가 꽃봉오리를 맺기까지 기다려왔다. 피어나기 직전의 한없이 약한 꽃봉오리. 그러면서도 한없이 아름다운.


관웅은 조용히 한 손을 내밀어 그래의 얼굴을 감쌌다. 희고 말랑한 그 뺨을 쓰다듬어본다. 곱게 감긴 눈동자는 그 모양마저 은은한 색기가 감돈다. 관웅은 엄지로 그래의 눈썹과 눈두덩을 부드럽게 쓸어보았다. 익숙한 체취와 따뜻한 손길에 그래가 눈을 떴다. 그래는 관웅이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는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어쩐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관웅도 굳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말 대신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이마에 덮인 그래의 머리칼을 치워내고, 그 위에 키스했다. 이마에 입술이 닿은 후에도 관웅은 한참동안 그대로 있었다. 그래는 관웅의 입술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그대로 받고 있었다. 관웅은 다정하게 그래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입술을 떼었다. 그래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관웅은 손가락으로 그래의 얼굴을 더듬었다. 부드럽게. 그의 손이 그래의 입술을 쓸어본다. 통통하고 예쁜, 그 붉은 입술을.


그래의 눈에 가득 고였던 눈물이 얼굴 옆으로 떨어졌다. 관웅은 그 눈물도 엄지손으로 닦아주었다. 그래는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사랑해주세요."



관웅은 잠시 묘한 표정을 짓더니, 곧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고, 입가에는 조금 미소를 띄웠다. 자신은 항상 장그래를 사랑해왔던 것이다. 그러니 그래는 자신의 사랑을 갈구할 필요가 없다. 앞으로는 넘치도록 사랑을 줄 것이다. 장그래가 거부한다 해도. 


하지만 그래 또한 관웅의 사랑을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래는 항상 관웅의 사랑을 갈구해왔다. 관웅의 부인인 자신의 엄마보다 더. 그래는 늘 관웅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자신만 사랑해주길 바랐다. 그래는 관웅이 엄마를 사랑하지 않아서 좋았다.


관웅은 그래를 향해 천천히 상체를 숙이고, 그래의 두 뺨을 가볍게 붙잡은 뒤, 그 입술에 두어 번 짧게 키스했다. 그래는 눈을 감은 채 키스를 받은 후 다시 눈을 뜨고 관웅의 눈빛을 마주보았다. 관웅의 눈에도, 그래의 눈에도 후회는 없었다. 오로지 욕망만이 가득 차 있었다.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서로를 향한 욕망들이.


관웅은 고개를 기울여 그래의 입술에 깊게 키스했다. 그래는 밀고 들어오는 관웅의 혀에 입을 열어 그를 받아들였다. 농염한 키스였다. 부드러운 혀끼리 맞대고 핥는 느낌에 머리가 아찔했다. 입술을 떼고, 관웅은 그래를 보며 천천히 자신의 상의를 벗었다. 관웅의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어른의 몸이었다.


관웅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두 사람의 상체를 맞닿게 했다. 그래의 얇은 잠옷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심장이 쿵쿵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는 두 손을 들어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관웅의 목을 끌어안고, 두 다리로 관웅의 몸을 얽었다. 관웅은 그래의 턱과 뺨과 귀에, 그리고 눈에 키스했다. 그래의 위로 관웅의 키스가 비처럼 내렸다.


마지막으로 그래는 생각했다. 관웅의 애무에 잠식되어가며, 어린 그래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내 것이라고. 날 사랑하고 있다고.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그가 지금 날 사랑해주고 있다고.


앞으로 긴 밤이, 수많은 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관웅은 생각했다. 자신은 오늘밤 꽃을 얻었다고.


영원히 시들지 않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담은, 



배덕이라는 이름의 꽃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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