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웅그래/천그래] 라면

ㄴ미생 기타 2015. 5. 2. 08:11





실수였다. 

실수여야만 했다. 

그러나 실수라기엔 모든 기억이 너무 생생했다. 





[ 라면 ] 





관웅이 눈을 뜬 것은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머리는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어제 독한 술만 골라 마셨던 걸 생각하면 무난한 수준이었다. 머리를 몇 번 흔든 관웅은 습관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그가 절대 예상하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킹사이즈 베드에 미끈한 어깨와 등을 드러내고 옆으로 누운 저 모습은, 저 동그란 뒷통수는. 


갑자기 괜찮다고 생각했던 관웅의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마르고 가늘어 보이긴 했지만, 저건 어딜 봐도 여자의 라인이 아니었다. 차라리 소년과 청년의 중간에 있는 몸이라고 보는게 맞다. 그렇다는 것은, 저 몸의 주인은 남자다. 내가 남자와 어제 이곳에.......? 

관웅은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몸을 살폈다. 분명 나신이다. 침대 주변에는 어지럽게 두 사람 분의 옷가지가 흐트러져 있다. 어떻게 두 사람 분인걸 알았냐고? 바지도 두 개, 팬티도 두 개니까. 관웅은 점점 더 머리가 아파왔다. 내가 설마 남자와...남자와 잠자리를 함께 했다고? 


하지만 어제는, 

어제는 바이어 접대 자리였는데. 

아니 그 이전에, 

난 남자는 취미 없는데....? 


관웅은 재빨리 어제의 일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중동쪽에서 올라왔던 바이어는 융숭한 대접을 원했다. 관웅은 처음에 서포트 인원 없이 두 명의 바이어를 모시고 강남쪽으로 향했다. 바이어들의 요구로 꽤 고급 풀살롱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오 팀장에게 전화가 와 사람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냥 없어도 될 것 같았지만 술이 들어갈수록 진상이 되어가는 바이어들을 보니, 서포트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왔던 것이. 


그래서 왔던 것이 하필 전혀 도움이 안 될 것 같던 계약직 막내 사원 장그래였다. 


변변히 사람 몫이나 하겠나 싶었던 관웅의 우려와는 달리, 그래는 아가씨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곱상한 얼굴을 하고선 테이블에 이마를 박아 폭탄주를 마는 등 바이어들을 기쁘게 해주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렇게 시간은 금방 새벽으로 넘어갔고, 아가씨를 한 명씩 끼고 앉아있던 그들은 본색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장그래에게 노래를 시키거나 춤을 추게하는 것 까진 괜찮았지만,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아가씨들에게나 시킬 법한 일들을 요구하니 관웅의 표정도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관웅이 공으로 과장 직급을 단 것은 아니라, 그는 장그래를 다시 자신의 옆자리에 앉혀 보호하면서도 바이어들의 기분을 최대한 상하지 않게 만든 후 바로 풀살롱 윗층, 즉 침실로 그들을 아가씨와 함께 올려보냈다. 

장그래는 바이어들에게 농락당했던 그 잠깐의 시간 동안 혼이 나간 것인지 바이어 일행이 모두 나가고 나서도 제자리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시선은 아래로만 꽂혀 있었다. 관웅은 아직 나이도 어린 장그래가 이런 일을 겪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또한 혹여 이런 퇴폐 접대를 일반적인 것으로 생각해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아무튼 관웅의 마음은 완전 조카를 대하는 삼촌의 그것이었다. 누가 뭐래도 장그래는 관웅과 열 살도 넘게 차이가 나는 '꼬맹이'니까. 


"장그래 씨. 괜찮아?" 

"예?? 아, 예. 전 괜찮습니다, 과장님....." 


괜찮기는 개뿔. 그대로 뒀다면 바이어들은 그래에게 스트립쇼나 산삼주라도 시켰을 것이다. 정말 그런 꼴까진 보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었다. 저들이 원하던 대로 아가씨까지 끼고 밤을 보내게 해줬으니, 계약은 뒷말 없이 어떻게든 진행 될 것 같았다. 간만에 더티한 놈들이 걸려서. 


"욕봤어. 나가자." 


관웅은 그래의 어깨를 툭 치고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그 모습을 황망히 바라보던 그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멀쩡해보이던 얼굴과는 달리 아까 꽤나 쇼크를 받았는지 장그래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기어이 테이블과 소파 사이에서 다리가 엉켜 관웅 쪽으로 고꾸라지던 그래를 재빠르게 받아내자,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상사의 품에 안겨서는 금세 귀가 시뻘개진다. 관웅은 작게 한숨을 쉬며 그래를 똑바로 일으켜 세웠다. 


"정말 괜찮아?" 

"아....." 

"...." 

"솔직히.....잘 모르겠습니다.........딸꾹." 


가관이었다. 그래의 입에서 딸꾹질이 나왔다. 깜짝 놀란 듯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막아버린 장그래였지만, 한 번 터진 딸꾹질은 마치 댐이 무너진 것처럼 딸꾹, 딸꾹하며 계속 쏟아졌다. 관웅은 그제서야 그래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룸 안의 색색깔 조명들 때문에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래의 눈가가 벌겋게 흐린 것이 와서 분위기 띄운다고 급하게 마신 술로 벌써 알딸딸하게 취한 것 같았다. 


하아. 


관웅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시계를 보았다. 새벽 2시. 
그나마 오늘이 금요일인 것이 다행이었다. 


"장그래 집이 어디지?" 

"수....딸꾹, 수색동이요. 딸꾹!" 

"오늘은 택시 타고 들어가서 비용 청구해. 들어갈 수 있지?" 

"딸꾹, 그게.....딸꾹," 

"왜, 뭐 문제 있어?" 

"그.....딸꾹! 과장님, 그러니까 과장, 님.......딸꾹!" 

"나 뭐." 

"왜 그러고 딸꾹! 계세요??" 

"내가 왜." 

"딸꾹, 과장님이, 딸꾹! 이케.....드 명......." 


아 XX 설마. 장그래. 


"헤헤, 과장님, 딸꾹! 과장님이 드 명이네여? 딸..꾹!!" 


장그래 발음이 급속하게 꼬여갔다. 다시 한 번 어깨를 붙잡고 눈을 맞춰보니, 장그래 얼굴에서 헤실헤실 웃음이 발사되고 있다. 그 얼굴이 또 완전 어려보여서 관웅은 급격히 당황스러워졌다. 그런 관웅의 형편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래는 헤실대며 관웅을 향해 웃음을 쏘아댄다. 


"과...장님! 딸꾹.....우리, 해장하고 가여! 딸꾹!" 

"장그래." 

"딸꾹! 라면...나 라면 디게, 잘 끓이는데.....딸꾹!" 

"장그래," 

"이케이케....파 송송....계란 탁!! 딸꾹~" 


그래는 급기야 눈을 감고 파 써는 흉내를 내더니 팍 하고 계란(?)을 관웅 코 앞에 깨트린다. 가만 뒀다간 바로 넘어갈 것이 뻔하기 때문에 관웅은 그래를 두 손에 안고 그 꼴을 다 보아야 했다. 이대로 택시 태워 보내면 귀가는 고사하고, 어디 어두운 놀이터에서 아리랑치기나 안 당하면 용한 상황이다. 


"과...과장 딸꾹! 님이, 라면 맛을 아라여??" 

"...너 일단 여기서 좀 나가고 보자." 


관웅은 한숨을 쉬고 그래를 부축해 문을 열고 나갔다. 오늘 돈을 많이 쓴 관웅 일행을 보고, 상무며 마담이 뛰쳐나와 융숭하게 인사를 한다. 어이쿠, 여기 이 분 괜찮으시겠어요? 완전 갔네, 갔어. '상무님'이 장그래 걱정을 하며 관웅을 쳐다본다. 관웅은 자기 팔에 눈을 감고 기댄 채 계속 옹알이처럼 뭐라 중얼거리는 장그래를 내려다 보며 또 한번 한숨을 쉬었다. 장그래 소원대로 라면 먹고 가는 수밖에. 일단 술은 깨야할 것 아닌가. 

가게에서 완전히 나와, 거리로 나가자 늦여름인데도 꽤 쌀쌀한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관웅은 피곤했다. 갑자기 한 열 살은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이런 꼬맹이를 접대 자리에 부르는게 아니었는데. 
취해서 기껏 파송송 계란탁 거리는 애기를. 
후회 막심이다 정말. 


속으로 쓰게 반성하던 관웅은 곧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강남 뒷골목 포차촌으로 그래를 부축해 데리고 갔다. 








"장그래. 라면 맛있냐?" 

"......맛 없는데요. 딸꾹!" 


관웅은 점점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지금까지 관웅이 회사에서 보아왔던 장그래라는 청년은, 묵묵하게 자기 일을 하고, 상사의 말을 하늘같이 모시는, 그러면서도 자기 주장을 내세울 때는 또 내세우는, 그런데도 외모는 참 여려보이는 그런 캐릭터였다. 그러나 지금 포차 안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아있는 이 장그래는, 그냥 어디 대학가에서 주정뱅이 한 명을 툭 뽑아온 것만 같은 캐릭터로 변해 있었다. 


"...장그래 주사가 좀 있구나." 

"과장님...나 이거 딸꾹, 안 머글래요." 


아까부터 라면그릇을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인양 코를 박고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래가 갑자기 어린애처럼 땡깡을 부렸다. 관웅은 뭐라고 하려다가, 그것조차 귀찮아져 그냥 유리컵에 물이나 잔뜩 따라 그래에게 내밀었다. 


"라면 안 먹을 거면 물 마셔." 

"시른데.....딸꾹." 

"마셔야 술 깨지." 

"시러여............딸꾹." 

"아까 라면 먹고 싶다며?" 

"딸꾹! 라면에.....딸꾹, 계란이 없다......딸꾹" 


혼잣말인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신경 거슬리게 하는 반말이었다. 관웅은 잠깐 이마를 짚고 속으로 참을 인 자를 세 번 그렸다. 
사실 장그래만 취한 것이 아니었다. 관웅도 취기가 올라온 상태였고 피곤했다. 이 자리는 연이은 지방 출장 뒤 쉬지도 못하고 바로 투입된 접대자리였다. 장그래? 아까 잠시 유용했는지 몰라도, 지금은 서포트는 커녕 짐짝에 가까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버리고 갈 수도 없는 짐짝. 아주 애물단지다. 

그럼 그렇지, 이런 어린애가 뭘 한다고. 

월요일 출근하면 오 팀장에게 아주 진상을 부려야겠다고 다짐하는 관웅이었다. 








"자, 장그래 다 왔다. 얼른 자라!" 


그렇게 술은 깰 기미를 보이지 않고, 관웅도 점점 어지러워지고, 먹으라고 시켜준 라면은 먹지도 않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그래를 데리고 관웅이 온 곳은, 강남 뒷골목에 흔하디 흔한, 아니 흔한 것보단 좀 더 고급스러운 모텔이었다. 젊은 영혼들이 주말 밤을 불태우고 있는 것인지 일반실은 다 차있어서 본의아니게 특실로 업그레이드를 해버리게 되었고. 

관웅은 손목시계를 살폈다. 벌써 새벽 4시였다. 이미 와이프도 잠들었을 시간. 아까 잠시 문자를 보내놓긴 했지만, 외박이 되는건 변함없다. 관웅은 고개를 흔들었다. 앞으로 다가올 주말에 와이프에게 시달릴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넌더리가 났다. 이게 다 장그래...요 녀석 때문에.....! 

관웅은 새삼 그래가 얄미워 어깨를 부축해놓은 그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는 발그레한 얼굴로 얌전하게 관웅의 팔에 기대있을 뿐이었다. 눈은 반쯤 감겨있는데, 속눈썹이 참 길고 눈매가 참 야살스럽게 생겼........ 


아 잠깐. 

내가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지. 

아무래도 오늘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보다. 



관웅은 침대 쪽으로 그래를 끌고 가 일단 그 위로 앉혀놓았다. 그러자 앉혀놓기가 무섭게 그래는 베개를 찾아 일자로 누워버린다. 관웅은 잠깐 고민했다. 집으로 들어갈까, 말까. 지금이라도 택시를 잡을 수는 있다. 하지만 1~2시간 내에 첫 차가 다니기 시작할 것이다. 돈이 좀 아까웠다. 누워서 벌써 도롱거리는 그래를 보니 관웅도 피곤한 몸을 뉘이고 싶은 맘이 간절하다. 그래,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토요일이 됐다. 모텔비는 관웅의 지갑에서 나갔다. 침대는 넓고 깨끗하다. 

관웅은 재킷을 벗어던진 후 그래 옆에 풀썩 누워버렸다. 누운 채 넥타이를 풀어 방바닥에 던지고, 리모콘을 찾아 실내등을 다 꺼버리고, 


관웅도 잠이 들었다. 









관웅은 잠결에 와이프를 끌어안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보드라운 살결이 만져졌다. 
웬일이지, 옷을 벗고 자다니.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는 밤일도 하기 힘들 정도로 나날이 빡셌던지라, 관웅의 아내는 언제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에게 갈 수 있도록 항상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왜 오늘은....? 

관웅은 이런거 저런거 생각하기 귀찮았다. 어제의 접대는 너무 고달팠다. 관웅은 아직 잠에서 덜 깬 상태였고, 방 안은 캄캄했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았다. 관웅은 비몽사몽 하는 중에도 오랜만에 아내의 맨 몸을 만지게 되자 흥분했다. 그도 그럴게, 관웅도 사내였다. 아직 30대. 아침마다 어김없이 씩씩하게 텐트를 치는 '사내'였던 것이다. 


"여보..." 


관웅은 슬그머니 아내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그리고 어깨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래도 아내는 요지부동이었다. 깊게 잠든 모양이다. 순간 관웅의 마음 속에 조금 야한 욕망이 싹텄다. 관웅은 일단 자신의 셔츠를 벗었다. 셔츠를 다 벗자, 이번엔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벗어 침대 밖으로 던졌다. 부드러운 시트와 이불이 맨 살 위로 느껴졌다. 관웅은 눈을 감은 채 아내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몸은 착 겹쳐져 있었다. 관웅은 아내의 뒷통수에 한번 쪽 하고 키스한 후 뒤에서 깍지를 꼈다. 아아. 이게 얼마만에 안아보는 아내의 몸인가. 이게 얼마만에 제대로 해보는 XX인가...! 



근데.... 

요즘 애 돌보느라 고생이 심했던 걸까. 

몸이 많이 말랐네..... 

샴푸도 바꾼 건가? 향도 좀 다른데. 

에라. 

모르겠다. 

오늘 아침은 욕망에 충실하련다. 



관웅은 꿈결인 듯 졸린 눈을 그대로 감은 채, 아내의 고개를 돌려 깊이 입맞추기 시작했다. 









몸이 간질간질하다. 어깨에 따뜻하고 촉촉한 것이 내려앉는다.
곧이어 누군가가 자신의 고개를 돌려 입맞춰 온다. 그래는 얼결에 입을 다물었지만, 곧 부드럽게 뺨을 훑어오는 손길에 조금 입술을 열어주고 말았다. 그러자 곧바로 뜨거운 뭔가가 입 안으로 들어와 헤집고 핥아댄다. 그래는 숨이 막힐 정도로 깊은 키스를 받았다.


아. 기분 좋은 키스다....

근데 잠깐.

여기가 어디지?

지금이 몇시지?

나 분명 어제......



음.



생각이 나질 않는다.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그저 계란도 없이 성의없게 끓여져 있던 라면의 초근접 화상. 

왜, 왜 이런게 머릿속에.


뭐지...
라면......계란도 없이 파만 송송.......
라면..........



그래 머릿속이 순식간에 아찔해졌다. 세상이 진짜로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기분이다. 
아, 이 기분은 뭐지. 어지럽다. 이건 꿈인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래는 자신의 맨 살 위를 스치는 따뜻한 손길에, 한없이 깊게 다가오는 입술에 모든 생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기분 좋은 꿈은 오랜만이니까.


그래는 철썩같이 이 모든게 꿈이라 믿으며,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은 이를 향해 몸을 돌리고 다시 입맞춤을 돌려주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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