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웅그래/천그래] 알고 있어 (토마토님 리퀘)

ㄴ미생 기타 2015. 5. 1. 17:58



[알고 있어]







업무차 손님과 밖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들어온 관웅은 책상 위에 놓여있는 "감사합니다"라고 쓰인 쪽지를 발견했다. 영문을 모를 쪽지에 주변을 둘러보다 관웅은 문득 앞자리에 앉은 장그래와 눈이 마주쳤다. 장그래는 고개를 까딱 하고 관웅과 눈을 맞추며 인사했다. 그리고 입모양으로 작게 말했다. "잘 먹었습니다" 그제서야 관웅은 그래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깨달았다.


팀 막내인 장그래가 유난히 군것질을 좋아해서 책상 서랍에 항상 맛있는 것들을 채워두고 있다는 것을, 사실은 팀에서 관웅이 제일 늦게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알게된 후론 항상 그래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는 그였다. 별다른 이유는 아니었고, 그저 꼼질거리며 책상을 열고 안을 더듬어 단 것을 찾아 입에 쏙 넣고 오물거리는 모습이 귀여워서였다. 꼭 다람쥐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어느날, 관웅은 한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되었다. 그 다람쥐가 바로 자신을 좋아한단 사실이었다. 굳이 알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과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쑥스러운듯 고개를 피하며 볼을 발갛게 물들이는데 알아채지 못할 수 없었다. 왜 하필 남자인, 그것도 유부남인, 나이도 열한 살이나 많은 자신을 좋아하게 된 걸까? 장그래가 (숨기려 하지만) 내비치는 감정은 단순한 동경이나 호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관웅은 30대 후반의-연애도 결혼생활도 해볼 만큼 해본-남자로서, 도무지 저 어린 청년이 어쩌다가 자신을 사랑하게 됐는지 도통 모를 노릇이었다. 한창 알콩달콩한 연애를 할 시기가 아닌가, 저 또래는. 자신만큼이나 어리고 풋풋한 여성과, 사랑으로 인한 모든 첫 경험들을 하며. 그런데 왜 이런 닳고 닳은 유부남에게 엉뚱한 감정을 품은 것인가? 관웅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편으로는, 저 나이땐 모든 것이 다소 충동적이고 무모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 장그래에게 다소 냉정하게 굴었던 관웅이었다. 결코 좋은 감정 가지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쩌면 장그래는 자신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사명감을 사랑과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장그래의 감정이란 관웅에게 다소 미스테리어스한 것이었다.


관웅은 일어서서 그래에게 다가갔다. 그래가 흠칫 놀라며 다시 뒤돌아 자리에 앉은 채 관웅을 올려보았다. 관웅은 싱긋 웃고 "사실은 내가..."라고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가 장그래에게 내민 것은 회사 근처의 유명하다는 제과점에서 사온 쿠키였다. 한 개에 천 오백원 짜리. 딱 받기에 부담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성의없어 보이지도 않고. "오늘 손님이랑 커피 마신 데가 이걸로 유명하다길래."


그래의 눈이 놀라움에 커졌다가, 얼른 두 손을 내밀어 그 쿠키를 받는다. "가, 감사합니다 과장님," 관웅은 별 것 아니라는 듯 씩 웃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장그래는 좀처럼 손에 든 쿠키에서 눈을 뗄 줄을 모른다. 얼굴은 벌써 벌개져있다. 뜨거운 두 뺨을 본인도 느꼈는지, 얼른 의자를 돌려 모니터에 얼굴을 박는다.


관웅은 가끔 생각했다. 자기가 더 젊었으면 어땠을까. 예를 들어 장그래와 같은 나이였다면. 그러나 그는 이미 37살이기에 그런 가정따위 무의미한 것이었다. 자신이 아직 싱글이었다면 어땠을까, 이 또한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것이었다. 자신은 이미 나이들었고 결혼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하나 깨닫게 된 것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장그래가 알았다면 정말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그래는 영원히 알 수 없겠지.



관웅이 깨달은 진실은 이것이었다. 어릴 수록 쉽게 사랑하고, 나이 들수록 사랑에 빠지기 어려워 진다. 때문에 나이 들어 하는 사랑일수록 더 깊고 뜨거울 수 있다.



자신의 장그래를 향한 표현은 딱 이정도가 좋다. 귀여운 팀 막내에게 간식거리를 가끔 챙겨준다거나 하는. 그러나 여기서 더 나가면 곤란한 것이다. 장그래는 절대로 관웅의 마음을 알아선 안 됐다. 조그만 마음의 조각조차 눈치채서는 안됐다. 대신 관웅만이 장그래의 마음을 알고, 느낄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느낀다 할지라도 모르는 척 해야 했다. 사랑하지 않는 척. 사랑받는지 모르는 척.


장그래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열 때문에 자신의 두 뺨을 손으로 감쌌다. 오늘따라 왠지 천과장의 눈빛이 따뜻한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관웅 과장님은 내가 좋아하는 것도 모르는데. 안다 해도, 날 좋아해주실 리 없는데. 모든 것이 관웅의 뜻대로 돌아가고 있었고 그래는 착실하게 관웅의 의도 안에서만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의 사랑은 어디로도 뻗어나갈 수 없었다. 심지어 관웅에게로도.


관웅은 허둥대는 그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담배를 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때면 관웅은 담배를 피지 않고 버틸 자신이 없었다. 넝쿨보다도 빠르게 자라나는 자신의 마음을 얼른 뿌연 연기로 감춰야만 했다. 관웅은 자신이 어쩌다 이런 불량 중년이 되어버린 것인지 한심했다. 장그래가 왜 날 사랑하냐고 묻는 것보다 그 반대가 더 어려운 질문이었다.



나 천관웅은 왜 장그래를 사랑하는가?


평생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감정임을 알면서도.


장그래, 네가 날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도.



옥상으로 올라간 관웅은 사람 없는 곳으로 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언젠가 장그래 안의 그 설익은 감정은 정리가 될 것이다. 관웅을 잊고 아마도 예쁜 여자를 만나 진짜 사랑을 하게 되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면 관웅의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더 관웅은 모르는 척 해야 했다. 모든 것을. 나의 마음을, 너의 마음을.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깊이 한모금 빨아들인 관웅이 연기를 공기중에 뱉어냈다.

연기로 가려진 시야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관웅은 이제 자신의 마음도 보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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